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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네가 누구 덕분에 먹고 사는 줄 알아? 내가 세금 내줘서 월급 받는 거 아니야? 공무원이 시민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는 말이야. 규정 때문에 안 된다고? 규정에 문제가 있어서 시민이 불편을 겪으면 규정을 고칠 생각을 해야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하면 다야? 내가 여기 누구랑 아는 사이인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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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 예. 알겠습니다. 예, 예” 나는 상대방을 대충 달래고 전화를 끊었다. 오늘은 유난히 진상이 많았다. 일하다 보면 가끔 이런 날도 있는 법이다. 옆자리의 신입은 거의 울먹이며 전화를 받고 있었다. 하긴 힘들게 시험 보고 입직했는데 오자마자 하는 일이라곤 처음 보는 사람한테 욕먹는 것이니 눈물이 날만 했다. 심지어 남들은 다 퇴근했을 법한 밤 9시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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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나도 수습 딱지를 뗀 지 얼마 안 되었다. 커트라인 성적에 맞추느라 집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 지원했고 덜컥 합격했다. 집에서 직장까지는 거의 2시간이 걸렸다. 당장은 돈이 없어서 집에서 출퇴근했는데, 퇴근 시간이 보통 9시가 넘어가다 보니 집에 도착하면 거의 12시였다. 다음 날 출근을 위해 6시에는 일어나야 했으니 뭔가를 할 새도 없었다. 주말이라도 푹 쉬면 모르겠는데 밀린 업무니 비상근무니 해서 토요일, 심지어 일요일까지 출근하는 날도 많았다. 나는 결국 회사 근처에 자취방을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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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취방을 구하고 처음 며칠은 좋았다. 퇴근 후 조금이나마 여유도 있었고 잠도 몇 시간 더 잘 수 있었다. 그러나 급하게 구한 자취방은 상태가 영 좋지 못했다. 구석의 벽지에 핀 곰팡이 정도는 애교였고 수압이 약해서 변기가 막히기 일쑤였으며 하수구에서는 온갖 냄새가 올라왔고 심지어 방음도 엉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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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부터는 새벽마다 벨소리가 들려와서 잠을 설치곤 했다. (ring) 회사 전화의 벨소리와 똑같아서 들을 때마다 신경이 날카로워졌다. 며칠간 시달리고 나서 옆집 윗집 아랫집에 찾아가 보기도 했으나 새벽에 벨소리를 울리는 범인을 찾지 못했다. 어느 날은 벨소리가 들리자마자 복도로 나갔는데 복도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양해를 구하고 다른 집에 들어가 보기도 했지만 역시 벨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벨소리는 오직 내 방에서만 들리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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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기분 나쁜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평소처럼 그 벨소리에 잠에서 깼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벨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평소보다 신경이 더 예민해서 벨소리가 더욱 크게 들렸다. 벨소리는 침대 옆의 벽 속에서 울리는 것 같았다. 벽 속에 무언가 있는 것일까? 그때 벨소리가 덜컥 끊기고 전화가 연결되었다. 무언가 알 수 없는 잡음이 울리다가 그 소리가 점점 내게 다가왔다. 벽에서 무언가 튀어나오고 있었다. 거대한 입이었다. “공무원이 시민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는 말이야. 규정 때문에 안 된다고?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하면 다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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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에는 집에서 출퇴근하던 때보다 더 컨디션이 엉망이다. 낮에 일하면서도 정신이 몽롱했고 민원은 더욱 심해졌다. 욕을 먹거나 협박을 당하거나 하는 것이 점점 아무렇지 않게 느껴졌다. 감정이 메마르는 것 같았다. 나 역시도 친절을 잃고 딱딱하고 차가운 말투로 변해갔다. 내 목소리를 듣고 내가 놀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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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국 부동산과 집주인에게 연락했다. 혹시 이 집에서 무슨 사고라도 있었는지, 아니면 내가 겪은 것과 비슷한 문제를 겪은 적이 있었는지 물었다. 부동산은 나 몰라라 했고 집주인은 괜한 트집을 잡지 말라며 핀잔을 주었다. 나는 화가 나서 진상 민원인처럼 굴었고 그동안 별다른 사고나 문제는 없었다는 답변을 겨우 들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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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는 와중에도 새벽의 벨소리는 계속되었다. 벽에서 거대한 입이 튀어나오는 환각도 더욱 자주 보였다. 거대한 입은 매번 비슷한 폭언을 내뱉었다. 진상 민원인에게 자주 듣는 말들이었다. “내가 세금 내줘서 월급 받는 거 아니야? 내가 여기 누구랑 아는 사이인데,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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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곡괭이로 벽을 부수어 버릴까 생각도 했지만, 임대차계약서에 찍힌 월세 보증금을 보고는 바로 포기했다. 벽 속에 시체를 숨기고 콘크리트로 메운다는 괴담이 떠올랐다. 에드거 앨런 포의 단편소설 ‘검은 고양이’에서도 부인과 고양이를 죽여서 벽 속에 묻어버린 남자가 등장한다. 고양이의 울음소리 때문에 남자는 범행 사실을 들키게 된다. 혹시 내 방의 벨소리도 복잡한 사연이 있는 것은 아닐까? 누군가 내게 억울한 비밀을 파헤쳐 달라고 하소연하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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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내게는 그 비밀을 파헤칠 시간도 능력도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림뿐이었다. 월세 계약 기간이 끝나기를, 민원이 덜 한 부서로 발령 나기를, 혹은 진상 민원이나 새벽의 벨소리에도 아무렇지 않게 될 수 있기를. 하지만 아직은 먼 미래의 일인 것 같았다. 나는 지금 낮에도 밤에도 잘 때도 누군가의 욕설에 시달리는 신세다. 언제쯤 편안한 하루를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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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이, 네가 누구 덕분에 먹고 사는 줄 알아? 내가 세금 내줘서 월급 받는 거 아니야? 공무원이 시민한테 이래도 되는 거냐는 말이야. 규정 때문에 안 된다고? 규정에 문제가 있어서 시민이 불편을 겪으면 규정을 고칠 생각을 해야지,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만 하면 다야? 내가 여기 누구랑 아는 사이인데, 어?”
유튜브 채널 <묘한담소>에서도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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